번역을 마치고. 생각들

3년반 동안의 투잡 생활이 이제 끝났다.

 

투잡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과연 언제나 했으려나? 친구 녀석이 갑작스레 꺼낸 아르바이트 이야기였고, 한글을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지만 급여는 월급으로 꾸준히 나올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추가 작업이 있을 시에는 추가로 돈이 나갈 거라는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영어의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고, 거기에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게 2008년 3월, 그리고 이제 계약이 종료되어 모든 업무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게 2011년 7월이었으니, 만으로 3년 4~5개월 정도를 한 것이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회사 생활을, 저녁 늦게 퇴근해서 새벽까지는 번역 작업을 했었으니, 돌이켜보면 참 피곤하고 고달픈 하루의 연속이었다. 주말이 다 되어 긴급으로 처리해 달라는 게 생기면, 주말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평소보다 일찍 돌아와서는 컴퓨터를 붙잡고 자판을 열심히 두들기던 생각도 난다.

 

과연 내 영어실력이 한->영 번역을 해서 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냐고 누가 묻는다면, 참 부끄러울 것 같다. 만약에 시작할 당시에 물었다면 더 곤란하지 않았을까 싶다. 되지도 않는 표현을 지어내서 문장을 만들어 낼 때,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문장을 가지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는 정말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만, 이 일로 인해 내 스스로가 일구어 낸 많은 성장을 보면 참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번 돈을 대강 세어 보니, 외제차는 힘들지 몰라도 제네시스 괜찮은 옵션은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어째 현실에선 노트북 한 대만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번역이라는 일을 경험해 보니, '마감'을 앞두고 있는 작가나 번역가의 심정을 몸소 느낄 수가 있었다.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일을, 거의 밤을 새 가며 억지로 맞췄을 때나, 야근 혹은 회식으로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로도 정신력으로 버텨 가며 엄청난 오타를 내면서 마무리지었던 때도 있었다. 안타까운 건 후반부에 가서는 마감을 툭하면 어겼다는 것이다. 정말 초반 2년 반 동안은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3~4일을 남겨 놓고 무려 50 장을 번역해야 하는 일도 있었고, 아침에 받아서 점심 때까지 어떻게 좀 달라고 해서, 근무하면서 틈틈이, 그리고 점심시간에 마무리 해서 넘겼던 적도 있다. 컴퓨터가 없어 PC 방에서 번역을 해야 해서, Word가 깔린 컴퓨터를 찾아 헤매기도 했었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꽤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만두지 않았던,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는 친구에게 내가 이 일을 하겠다고 했던 것도 있고, 내 스스로 일을 하지 않는 내 퇴근 후의 시간을 일을 하는 시간보다 더 값지게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일이 없는 주를 맞는 날에는, 단순히 웹서핑을 하다가 늦게 잠드는 날 보았었기 때문이고, 내가 강제로 영어라는 언어에 쏟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사업 영역이 조금씩 축소되는 걸 보면서, 이제 곧 나도 그만두게 될 날이 멀지 않았구나라는 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번역을 하지 않아 남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많이 했었고, 번역이라는 걸 핑계로 조금은 소홀이 했던 내 몸관리를 좀 하려고 한다. 약 두 달 전부터 수영하고 헬스를 다시 시작했는데, 항상 실패했던 '몸 만들기'를 어째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번역을 그만두니 어떠냐는 기분을 묻는다면 정말 '시원섭섭'이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더이상 마감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엄청난 분량에 놀라거나, 영어로 바꾸기 어려운 국어식 표현이 나왔을 때의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또 퇴근 후에 해야 할 '의무'가 사라졌다는 것에는 시원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월급 외 수익이 없을 때의 섭섭함과 허전함 역시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무려 3년반이라는 기간 동안에 길들여졌던 소비습관인데, 이제는 다시 월급만을 받고 생활하던 때로 돌아가야 하고, 조금은 더 절약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번역을 마치고, 비록 나의 이중생활은 일단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그간 내가 남겼던 자료는 인터넷과 나의 노트북에 그대로 남았고, 그간의 경험은 나를 조금은 더 큰 사람으로, 그리고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p.s. 그런데 어째 이렇게 오래 일을 하면서 사장님 얼굴은 한 번도 못 봤다는 것. 메일만 한 번 주고 받았다는..


덧글

  • moonscape 2011/08/22 00:53 # 답글

    헉........ 대단하십니다...!!! 3년 반씩이나요! ㄷㄷㄷ 전... 상상도 못하겠네요..ㅋㅋ쿠ㅜㅜㅜㅜㅜ 정말 시원섭섭하시겠어요. 그동안 힘드셨겠지만 왠지 당분간은 꽤 많이 허전하실것 같은^ ^ 수고 많으셨어요! 당분간은 좀 쉬시면서 충전의 시간을! ㅋㅋㅋ
  • 트레이시 2011/08/23 19:40 #

    저도 과연 언제까지 할까 싶었는데, 하다 보니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아마 수입과 지출 때문에 그렇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지나온 시간을 보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이 편안함이 좀 익숙하지 않았었답니다. 이젠 익숙해지니 좀 허전하긴 하네요. ^^
  • 웃음소리 2011/08/23 13:38 # 삭제 답글

    아직도 이글루스 쓰는구나.. ㅎㅎ

    번역이 끝나서 시원섭섭하겠군... 나는 체질적으로 투잡은 불가능할것 같은데..

    대단하시구만..
  • 트레이시 2011/08/23 19:41 #

    진짜 오랜만이네. 얼마만에 왔냐?.. 글 자주는 안 쓰는데, 그냥 가끔 긴 글이 쓰고 싶을 땐 여기에 남기기도 하지. 독후감 쓸 게 좀 밀렸는데 말이지..-_-

    투잡은 나도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하다 보니 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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